2008년 10월 08일
단상들
4개월 전에 했던 단상을 읽다가 기억해 둘 만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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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기만했음을 알았을 때,
우리의 영혼이 부서지고 끊어질 듯 아픈 까닭은
그(혹은 그녀)에 대한 믿음을 잃은 것 때문이 아니라
나에 대한 믿음을 잃는 것 때문일 것이다.
대체 사랑이라는 감정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 찰나의 알파는 뭘까
데카르트가 정념론에서 말한 것처럼 송과선에서 일어나는 '어떤 것'일까.
어떤 한 실오라기가 우리의 감정과 경험, 이성의 파일 위에 얹어지는 것일까.
다만 '알파'의 작용이 내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다.
상대와 내가 서로를 사랑하는 정도는 계량할 수가 없다.
일치될 수도 없고 확인할 수도 없다.
물질로, 노동력으로, 그리고 여러 수치화된 사회적인 맥락들로 매기는 헌신도에
근근히 기대고 있을 뿐이다.
내가 애인을 사랑한다고 할 때 그 순결도와 순수함에 대해서 나 스스로조차 확신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랑이라는 것은 원래가 그러한 것이니까.
하지만 그저 <사랑이 내게 왔다는 것>을 누리는 것.
그것이 겸손이 아닐까.
그래서 하나님은 '나는 사랑이라'고 한 것이 아닐까.
나는 내가 느끼는 미움과 기쁨, 사랑 그리고 분노 등의 감정...과 같은 것이
오로지 내 것이 아니라 '신'이 계획하고 고안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신 또한 그런 것을 말한 적이 없다.
내가 느끼고 아는 것... '내'가 안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까.
그저 이 순간, 내가 다른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외에
<얼마나-어떻게-왜> 사랑하는지 알 수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상대의 존재 자체만으로 완전해지는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가 내게 얼마나-어떻게-왜 사랑하는지 증명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이런 겸손..
내가 하게 된 사랑에 대해 스스로 신기해하는 그런 작고 사소한 마음이 신을 경외하는 신앙이라고 느낀다.
그래서 나는 내 상대도 신을 경외하는 신앙을 가지길 원한다.
왜냐하면 나는 나의 존재만으로 사랑받고 싶기 때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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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동성 친구가 없는 것은
내가 그들에게서 안전함을 못느끼고 따라서
어떤 사랑의 감정도 생기지 않아서이다.
나에게 우정과 사랑은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누군가와 몸과 마음을 분리시켜 감정을 발전시키지 못했다.
보통 십대에 동성과의 우정과 사랑을 분리하지 못해 생기는 감정들이 있다.
하지만 성장하면서 그들은 자신의 성역할을 성실히 수행해 간다.
그런 점에서 여전히 분리 단계가 이루어지지 않는 나는 십대와 같이 사회적으로 미성숙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내가 미성숙하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분리 단계로 성숙도를 가늠하는 것에 대한 반대이다.)
나는 동성 친구는 언젠가는 사랑을 찾아 떠나는 존재이기 때문에
단 한 번도 안전함을 느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내가 사랑을 느끼는 방식이나 우정을 느끼는 방식은
그것이 성과 무관하게 나라는 사람에 관한 문제로 회귀된다.
따라서 누군가가 동성 친구 보다 이성 친구가 많다는 형태의 인간관계 패턴을 보이거나
그리고 몸과 마음의 분리를 확실히 해내기 때문에 친구와 애인의 관계가 분명한
인간관계 패턴을 보인다는 것이 한 사람의 인격에 결함이 있고 없고,
혹은 인격의 점수화로 연결되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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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고 싶다.
하지만 살아있는 한, 멈출 수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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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다 친하게 지내지만 누구와도 친하지 않은.
이제는 현실을 직시해야 할 때인지도 모르겠다.
천연덕스럽게 내 얼굴에 찬물을 끼얹는 이들이 가까운 이들임을 인정해야 한다.
그들이 내 가까이에 있어준다는 이유 하나로,
그런 행위들이 괜찮고 (심지어) '재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곤했던
내 습관이 얼마나 추한 것인지 보게 되었다.
"누군가와의 진정한 친한 관계가 가짜로 탄로나는 날이 오면
저는 영원히 불구가 돼 버릴 지 모르"지만 진정하다는 것은 적어도 '찬물과 같은 그런 것'은 아니리라.
(보스턴리걸 4시즌 15화 앨런 쇼우)
# by | 2008/10/08 12:20 | small talk | 트랙백 | 덧글(0)





